조원래교수 남당의병 연구논문 요약 보고서 |
본 요약보고서는 조원래교수의 논문 요약본입니다.
2017/05/31
□ 논문 개요
◦출 처 : 한국사연구, 1983.9 75~99쪽(the Journal of Korean History)
발행처 한국사연구회(the association for korean historical studies)
◦저 자 : 조원래(趙援來),
◦논문명 : 興德南塘倡義와 蔡氏一門의 의병운동
◦주요내용
▸임진왜란 호남의병의 전반적 관점에서 남당의병의 특징을 중점적으로 기술
▸야수실기와 겁암록, 호남절의록, 부안고창군지 등을 참고, 자료의 한계 등은 인정
□ 『興德南塘倡義와 蔡氏一門의 의병운동』 요약
◦남당의병의 창의배경
▸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약 5만의 근왕군(勤王軍)이 용인에서 1만이하의 왜군 에게 대패하자 조선관군에 대한 실망,
이에 사림이 주도하는 의병창의가 진행
▸의병주도는 士林이었으며, 유교이념에 충실한 “忠孝와 勤王”이었음
▸채홍국, 고덕붕 등은 호남의병의 대장격인 고경명 의병부대에 참여하였으나. 고경명 의병이 금산에서 패전하자,
고향인 전북고창 남당(리)에서 창의
◦전라남도 장성의 남문창의와 흥덕남당창의 비교
▸김경수가 고경명 의병의 금산 패전후 기효간, 윤진과 함께 장선 남문에서 창의
장성 정운룡, 영광 이응종, 고창 김홍우, 태인 이수일, 담양 김언욱, 나주 김경남, 김 부,홍원, 함평 정철, 부안 김억일,
김해 김홍원, 광주 기효증, 박경은, 흥덕 서연은, 무안 윤황, 정읍 유희진, 무장 김선진 등이 참여하여 장성 남문 앞에서
단을 만들고 김경수를 맹주로 추대,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함
▸장성남문창의의병은 1592년 7월21일에 시작하여 11월24일 출병, 출병당시 의병 1,651명, 의곡 496섬이었음
▸전라지역 곳곳에서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하였음에도 전북 고창흥덕현 남당리에서
채 씨일문을 중심의 독립적 의병을 일으킨 것에 남당창의의병의 독특한 특징 있다.
◦平康蔡氏 判書公派 興德宗中의 채씨일문이 주축이 된 의병
▸관군참여 없이 전라북도 흥덕현 남당촌 채씨일문 사인, 인척, 가동으로 구성된 의병 이라는 특이사례
▸의병장인 채홍국과 지도부 모두 관직경력이 없었으며, 명망있는 의병장의 관여없는 민병의 一門共同體的 의군결성
▸야수실기에는 1592년 9월13일 약 500여명의 병력규모를 갖추는데, 흥덕현 인구가 5,000여명으로 남자인구를 2,500여명으로 추산,
남자인구 1/5이 모여 전라지역 각 지에서 모여 창의한 남문장성 의병이 11월24일 출병당시 1,651명이었던 점을 고려 할 때,
흥덕의 장정으로 구성된 남당의병의 군세는 작지 않음
▸남당의병이 남문장성창의 의병에 참가하지 않은 점, 흥덕현에서 관직경력이 전무한 양반과 평민으로 구성된 일문공동체적 의병이란 점 등으로
“고창흥덕을 지키고자 했 던 민병”으로 오해 할수도 있으나, 남당의병의 행적은 구국의병이었음을 증거함
◦체계적인 군사조직과 훈련, 의곡이 준비된 의병
▸야수실기 홍의소제임록에는 남당의병을 29개 군사조직으로 체계화
▸남당의병은 체계적인 군사조직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군사훈련도 시행하였음
▸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부대에 참전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훈련부족으로 참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음
▸전라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삼도연합군의 용인전투 대패와 고경명의병이 금산전투 패전 이후
체계적인 군사조직과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추측
-전라관찰사 이광의 삼도연합군이 5만여명의 대군이었음에도 일만이하 왜병에게 대패 한 것은
삼도연합군이 급조된 농민군으로 오합지졸이었으며, 지휘체계도 명확하지 않았던 바가 컸다.
-고경명 의병도 이광의 삼도연합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.
▸야수실기에 기효승과 채경달이 의주행재소에 의곡을 보내고 권율에게도 의곡을 보낸 것으로 기록
▸곡식이 없어 백성들이 힘들어 하던 전란기에 군량을 준비하고 의주행재소와 권율의 행주진영에도 군량을 보낸 것은
남당의병의 준비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음
▸다만 의주행재소에 의곡을 수송한 기효승은 남당의병이 아니라 남문장성의병 소속이 었던 점을 볼 때
남당의병은 장성남문의병과 상호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.
◦순천을 지나 석보창 진군과 회군
▸군사훈련에 매진하던 남당의병은 흥덕을 떠나 순천을 지나 석보창까지 진군하였으며
11월 18일 다시 순천으로, 이어 흥덕으로 회군.
▸남당의병이 석보창까지 진군하였던 점에서 창의목적이 향리 방위가 아니라 구국애민임을 증거함
▸야수실기에는 명나라 이여송의 벽파관 패배와 송응창의 화의로 인하여 회군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
회군일자가 11월 중순인 반면 벽파관전투 패전은 1593년 1월 하순 이어서 벽파관 패배가 회유라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려움
▸<1966년 부안대관 70쪽> 남당의병 김경덕의 기록에는
“화의론의 대두와 더불어 병량의 부족과 병사의 피로 등으로 회군하였다”고 하였음
◦정유재란과 풍신수길의 호남공략, 남당의병의 호남 요충지 부안고창 방어
▸풍신수길은 정유재침을 일으키며 “전라도는 빠짐없이 공략하고 충청경기는 가급적 공략하라”는 명령하달
▸1592년 임진왜침을 통해 전라도가 군사와 군량을 보충하는 전략거점임을 확인한 풍신수길은
조선의 왕을 공격하는 왜란초기 전격진공전략에서 1597년 정유재란은 전라지역 초토화가 주요전략임을 강조한 것임
▸바다와 산맥으로 좌우가 차단된 전라도의 지형적 특성으로 고창부안은 전주 정읍과 남도를
연결하는 길목이었던 바, 정유재란 시기에 남당의병은 남당 의병의 향리인 고창부안으로 침공한 왜적을 맞아 격전을 펼침
▸배풍령, 호벌치 전투는 연속적으로 진행된 전투로 각각의 전투는 아니었음
▸호벌치전투에서 남당의병 대부분이 전사하여 이후 전황기록은 분명하지 않음
▸참고문헌 : 호남절의사 221쪽, 임진육주갑기념출판회 1969 광주
전라북도지 상권 580쪽 전라북도지 편찬위원회 1969 전주
◦남당의병은 조선시대 지배계급이 아닌 지방/소외계층의 창의
▸야수실기에는 흥덕의병의 戰卒 高宗心이 남긴 시구가 있음
▸순천에서 회군할 때 순창 赤城江頭에서 35인의 題詠 중 하나임
忠義에 將卒이 따로 있으랴
死後에 이름 남기고 할 뿐이랴
만약 義軍의 功을 기록하려면
隊下의 모든 군사 하나같이 되어야 하리
▸전공이 양반만의 것이 되지않아야 하며 자신의 신원을 戰卒이라 하였음을 고려할 때 고종심은 양반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.
더불어 고종심의 제영이 야수실기에 기록 으로 남겨지는 것이 허락되었던 점을 고려하면
남당의병은 양반과 평민, 노비 등으 로 구성되었으며 주도계층인 양반 역시 당시 조선사회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
향리의 소외된 양반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
▸또한 남당의병이 임란당시 조선실록 등 관변기록에서 누락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
▸그러나 임란이후 200여년이 지난 정조시기에 편찬된 호남절의록에 남당의병 기록되고,
야수실기에 전라도 각지 유림에서 보낸 유장이 수록되어 있음을 을 고려할 때,
임란 당시 남당의병의 의기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음